책 읽는 써니의 독서살롱 - 위대한 개츠비 SKT 대학생 자원봉사단 Sunny

2012년 11월 30일 써니룸. 책 읽는 써니의 2번째 독서살롱. 그 날의 책은 1999년 모던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학' 2위, 2005년 타임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다. 이 책에는 많고, 긴 수식어들이 붙는다.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많은 소설가들이 이 책을 미국 현대문학의 거대한 지평을 불멸의 걸작, 명작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독서살롱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야기가 나오기 전 이 책의 앞 부분이 살짝 지루했다고 했다. 나 역시도 이 책이 조금 지루했다. 20세기 100대 영문학이라고 하는데, 다들 그렇게 명작이라고 이야기하는 데, 왜 그럴까? 사실 소설 속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해는 소설 속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면,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최인훈의 '광장'이 6.25전쟁, 남북의 분단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외국인들이 '광장'을 보고 느끼는 생소함과 우리가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느끼는 생소함이 비슷하지 않을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1920년대를 들여다보다

황금모자를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오, 내 사랑, 황금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내 사랑이여, 내가 당신을 차지 하리라"
-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 -

<위대한 개츠비>에 서문으로 나오는 시. 그는 왜 이 책에 이 시를 서문으로 썼을까? 아마 이 시가 이 책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914년 ~ 1918년,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인 번영의 시대를 맞이 하였다. 사실 20년대 미국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은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상황으로 자동차 산업 같은 상당한 기술의 발전도 한 몫을 더했다. 그런데, 1920년대의 이런 경제적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물질주의의 우세는 개인들의 획일화 또는 표준화를 가져왔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 셔츠 더미에 파묻힌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내 생각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 집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 산정 할 작정인 것 같았다. 가끔씩 그는, 그녀라는 놀라운 존재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는 듯, 멍한 눈초리로 자신의 소유물을 둘러보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소외와 환멸을 문학에 담았다. 1914년 이전 미국 문학의 특징이었던 풍요와 낙관주의가 사라지고, 피츠제럴드식의 無목적성이 등장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쾌락주의자들도 도덕적인 갈등을 겪고, 구시대의 의무와 새로운 욕망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도덕적 갈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을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사랑'을 들여다보다

5년 전,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여인을 매우 사랑한다. 그것은 잠깐의 사랑이 아니며, 가난했지만 정말로 순수했던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개츠비는 육군 중위로 가난했기 때문에 부유했던 데이지의 집안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비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청춘의 전부를 돈벌이에 바쳤고, 그는 주식 사업으로 성공하여 부자가 된다. 그는 부자가 된 후, 그는 데이지의 집 건너편 호화로운 저택에서 그녀의 집을 바라보고, 그 저택에서 거의 매일 밤 파티를 연다. 혹시 데이지가 보지 않을까. 파티에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안개만 없었다면 해협 너머에 있는 당신 집도 보였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당신 집 잔교 끝에는 언제나 초록색 등이 켜 있더군"

데이지가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하지만 개츠비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초록빛의 심대한 의미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과 데이지를 갈라놓았던 그 광대한 거리에 비하면, 그 초록빛은 거의 데이지를 만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졌을 것이다. 달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말이다. 이제 그것은 그냥 잔교 끝의 초록색 등으로 돌아 와 있었다.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사촌오빠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를 만난다. 하지만, 개츠비는 만나고 나서 찬탄의 대상 중 하나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5년 동안 품어왔던 너무나 어마어마한 환상 때문일까? 그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머리 속으로 오랜시간 데이지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다. 그의 머릿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 데이지에 대한 진짜 사랑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사실 진짜사랑, 가짜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릴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랑은 어떤 형식도, 방식도 없는 어렵고 알 수없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개츠비가 데이지 대한 사랑을 끝까지 추구했으며, 그가 그녀를 사랑했기에 했던 그녀를 위한 희생이 그를 행복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데이지와 개츠비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데이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이다.

눈 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 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독보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리고 자신의 길에 날리는 온갖 밝은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혼에 쌓아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데이지가 개츠비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선택한 그 행복감이 그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에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저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고, 다양한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것을 재확인 하고, 어떠한 정답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20세기 개츠비가 21세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세기 개츠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뭘까? 사랑에 대한 정의와 가치관은 다 다를지라도,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 같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현재 늑대소년의 '철수'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순수한 사랑,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은 아닐까?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라고.

아무리 환상이 컸더라도, 개츠비의 데이지를 향한 사랑은 성숙한 사랑은 아니였을까? 우리는 지금 얼마나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돈, 외모, 어떠한 외적 조건과 필요가 아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 또 영화 늑대소년의 철수의 사랑이 21세기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회에서 실현 불가능한 사랑이기에 조금 더 아름다워지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책 읽는 써니의 독서살롱 <위대한 개츠비>에 참여한 참가자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순수한 사랑. 그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한 처절하기까지한 개츠비의 노력. 그것을 통해 우리는 21세기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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